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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루쉰의 '아Q 정전'을 읽고

by 코믹디언 2015.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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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아Q 정전'을 읽고

 

 

 

중국의 문학을 읽어본 적이 있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억지로 쥐어짜내어 보아도 삼국지 그리고 수호지와 같은 고전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의 근대문학이란 것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읽게 된 것이 루쉰의 '아Q 정전'이라는 소설이었습니다. 특유의 인상적인 제목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마 고교시절 교과서를 통해 혹은 수능을 준비하며 한 두 번쯤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봅니다.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루쉰'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江)성 사오싱() 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저우수런(人)으로 '루쉰'은 그의 필명입니다. 1898년 그는 난징의 강남수사학당(해군학교)에 입학하였고, 곧이어 광무철로학당(철도학교)으로 옮겨가 당시 계몽적인 신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졸업 후 1902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간 루쉰은 1904년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의사를 꿈꾸던 루쉰은 미생물학 수업시간에 보여준 슬라이드에서 일본인이 러시아를 도운 중국인을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학교를 그만둡니다. 이후 문학으로 국민정신을 계몽하겠다는 뜻을 품고 1909년 귀국합니다. 그는 사람의 몸을 고치는 의사가 되기보다는, 사람들의 정신을 고치는 문학가가 되길 바랬던 것입니다.

 

'아Q 정전'은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의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아Q 정전은 1921년 12월 4일부터 1922년 2월 12일까지 베이징의 일간지 '신보'의 문예부간 '신보부간'에 매주 또는 격주로 연재되었고, 후에 그의 첫번째 소설집에 수록됩니다. 루쉰은 아Q라는 시골 날품팔이의 비참한 생애를 통해서 중국 국민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냉철하고 또 신랄하게 그려냅니다. 마치 지저분한 것이 잔뜩 묻어있는 얼굴에 거울을 보여주듯, 루쉰은 중국 국민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Q 정전 - 루쉰 지음(문학동네)

 

아Q 정전의 줄거리

제1장 머릿말을 통해서 루쉰은 '정전'이라고 칭한 이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열전이라고 하자니 주인공 아Q가 위인의 축에 들지 못하고, 외전이라고 하자니 내전도 있어야 할 것 같고 또 가전이라고 하자니 아Q와 자신이 가족이 아니라는 등의 이유로 선택한 것이 '정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Q'라 불리는 주인공의 독특한 이름에 대해서도 그 연유를 밝히고 있는데, 도무지 누구도 그가 어느집안 사람인지, 성씨가 무었인지 알 수 가 없고, 이름 또한 계수나무 계(桂) 자를 쓴 아구이(阿桂)인지, 귀할 귀(貴) 자를 쓴 아구이(阿貴)인지 알 길이 만무하니 서양자 Q를 써서 아Q라고 불렀더라는 것입니다. 

 

아Q는 이름 만큼이나 재미있는 인물인데, 좋게말하자면 재미요 실상은 웨이장(未莊) 마을의 놀림감이자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집도 없이 마을의 사당에서 기거하며 날품을 팔아 하루하루를 근근히 먹고사는 하찮은 처지임에도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모멸을 당하고 쥐어터져도 아Q는 그 만의 방법의로 의기양양한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정신 승리법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상대보다 훨씬 위의 사람으로 생각해버린다던가, 혹은 누가 자신을 비하하면 스스로 자신을 더 낮은 위치로 끌어내려버리는 뭐 그런 것 이었습니다.

 

어느날 자신이 경멸하던 왕 털보와 가짜 양놈에게 차례로 굴욕을 당한 아Q는 지나가는 젊은 비구니를 향해서 분풀이를 합니다. 비구니를 조롱한답시고 볼을 꼬집었던 아Q는 그날 밤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쉽사리 잠이 들지 못합니다. 여자를 알아버린 아Q, 어느날 자오 나리 댁에서 온종일 쌀을 찧던 아Q는 자오 나리 댁의 유일한 여자 하인인 우 어멈에게 대뜸 자신과 잠자리를 청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에 우 어멈은 질겁을 하며 울며 달아나고, 아Q는 실컷 두드려 맞고 쫓겨납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웨이장의 여인들은 아Q를 보기만 하면 문 안으로 숨어버렸고, 술집에 가도 외상 술을 주지 않았습니다. 자오 나리 댁에 출입을 금지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도 아Q에게 날품을 맡기지 않는 것 이었습니다. 배를 곯게 생긴 아Q는 마을 밖 암자에 담을 넘어가 무를 훔치다가 개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성안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합니다.

 

아Q가 웨이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중추절이 막 지난 무렵이었습니다. 아Q는 신수가 훤해져 있었는데, 좋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현찰이 두둑했습니다. 또한 웨이장의 여인들은 아Q가 가지고온 귀한 물건들을 사려고 안달이었는데 그 소문은 아Q를 내쫓았던 자오 나리의 귀에도 들어가, 자오 나리는 그를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Q와 접촉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웨이장에서 아Q는 경외의 대상이 되는 듯 하였는데, 그러나 아Q가 돈을 벌게된 경위가 망보기 도둑질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는 이내 시들해졌습니다.

 

1911년 11월 4일 혁명당을 피하기 위해 성안에서 자오 나리 댁으로 도망쳐나온 거인 나리의 소식에 웨이장의 사람들은 불안해 합니다. 평소 혁명에대해 부정적이던 아Q는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혁명도 좋은 것이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내치고 여자들을 차지할 생각에 아Q는 신이 납니다. 혁명당에 가입하기 위해 아Q는 가짜 양놈과 자오 생원을 찾아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납니다. 그날밤 자오 나리 댁이 도둑에게 털립니다. 웨이장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도 은근히 고소해 합니다.

 

아Q가 관청에 잡혀들어 간 것은 자오 나리 댁이 털리고 나흘 뒤였습니다. 자오 나리 댁을 털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아Q는 종이와 붓을 주며 동그라미를 그려라는 말에 순순히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그리고 몇일 후 아무것도 씌워지지 않은 가마에 태워진 아Q, 아Q를 태운 가마는 마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됩니다. 구경꾼들 속에서 아Q는 우 어멈을 발견하지만 우 어멈은 군인들이 멘 총에만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아Q는 총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웨이장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아Q가 잘못했으니 총살을 당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또 총살은 목을 치는 것보다 볼거리가 못된다며 투덜거렸습니다.

 


일그러진 민중의 자화상 

루쉰은 시골 날품팔이의 비참한 생애를 조금의 동점심도 없이 써내려 갑니다. 국민 계몽이라는 큰 뜻을 품은 그 였기에 오히려 더욱더 냉철하고 신랄했는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아Q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멸을 당하고 쥐어터져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내 승리자가 되는 아Q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무한한 긍정의 소유자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상은 덤벼들거나 저항하지 못하는 자의 합리화 일 뿐이었습니다. 정신 승리법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순간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보려는 패배주의 혹은 노예 근성의 상징 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신보다 약해보이는 사람(젊은 비구니) 앞에서는 한 없이 우쭐대는 아Q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허장성세 속에서 사는 인물인지를 잘 보여주고있습니다.

 

그저 사람 못난 것 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인 것을, 죄를 시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줄도 모르고 동그라미를 예쁘게 그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Q의 무지 몽매한 모습은 못난 것을 넘어서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한편 아Q를 무시하던 웨이장의 사람들, 그들이라고 별반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한 날은 아Q가 자신이 자오 가문의 후손이라는 허풍을 쳐 자오 나리에게 빰을 후려 맞았음에도 마을 사람들은 아Q를 은근히 두려워하고 경외시 하는 것 이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멸시하고 무시하던 아Q가 보기 좋은 행색에 주머니 두둑하게 돌아오자 이내 또 아Q를 경외심에 바라보는데 그것은 마을의 제법 권위있다고하는 자오 나리까지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없고 사람사이의 소통이라고는 볼 수 없는 그저, 들려오는 소문과 겉모습에 휘둘리는 우매한 민중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는 듯 합니다.

 

아Q가 총살을 당하는 대목에서 마을사람들은 눈앞에서 무고한 한 생명이 죽어가는데도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한치의 의구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총살은 목을 치는 것 보다 재미가 없다며 투덜거립니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그 어떤 죄인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차마 슬픔까지는 아닐지언정 모종의 엄숙함 정도는 느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웨이장 사람들이 보여준 이러한 모습은 단편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결여된 모습이었고, 또한 참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부재이자 남의 일이라면 그저 구경거리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인간성 혹은 인간애의 상실 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참다운 혁명에 대하여

소설의 또 다른 키워드는 바로 혁명입니다. 아Q 정전은 1911년 쑨원의 주도로 이루어진 신해혁명을 배경으로 하고있습니다. 신해혁명에 대하여 정확하게 잘 아는 처지는 아니지만, 소설속에 비치는 혁명의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혁명에 대해서 부정적이던 아Q는 단순히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혁명도 좋은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뿐만아니라 아Q는 혁명에 가담하여 자신을 무시하던 마을 사람들을 내치고 원하는 것 들을 차지할 상상을 하며 신이 납니다.

 

'좋구나, 좋아.....원하는 것은 모두 다 내 것이고, 마음에 드는 여자도 모두 내 차지다'

 

아Q에게 혁명이란 단순히 다른사람 보다 우위에 올라설 수 있는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차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뿐 이었습니다. 한편 혁명으로 불안해하던 웨이장의 사람들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안정을 되찾습니다.

 

루쉰은 아마도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 단순히 권력의 교체수단이거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뿐인 왜곡되고 변질된 혁명의 모습을 꼬집는 듯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소설의 배경인 신해혁명만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있었던 모든 혁명이라고 불리웠던 것들에게 던지는 날카로운 물음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참다운 혁명에 대한 의지이기도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위한 방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위한 수단이 아닌,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바로 그런 혁명에 대해서 말입니다.

 

주인공 아Q는 루쉰이 집필했던 신해혁명의 시절 혹은 그 이전에도 있었으며, 오늘날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입니다. 또한 아Q는 바로 우리 곁의 이웃에게도 그리고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Q 정전을 읽고, 단순히 시골 날품팔이의 비참한 생애에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서늘함을 느낄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서늘함이 아Q 정전이 세계적인 작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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