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를 읽고
오랜만에 반가운 책 한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만난 익숙한 책 한권,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제가 학창시절 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때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었는데, 이 책은 당시 유명했던 MBC 느낌표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된 도서였기 때문에 읽어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십수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니,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을 다시 읽어보니, 학창 시절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보아도 여전히 재미있고 좋은 책이더군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류되었던 황대권
황대권
책의 저자 황대권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유학의 길에 오른 그는 뉴욕 소재의 사회과학대학원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내 인생을 내 의지로 내가 바꿔 나갈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청년 황대권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1985년 6월이었습니다. 미국 유학 도중 부모님을 만나기위해 잠시 한국에 들렀던 황대권은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류돼어 체포됩니다.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서 만난 양동화와 김성만, 황대권등이 재미 북한공작원 서정균에게 포섭되어 간첩이 된 후, 국내에 들어와 극렬 학생에게 공작금을 주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것(1985년 9월 9일 안기부 발표)
안기부에서 62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후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결혼한지 10개월된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 있었던 서른살 가장 황대권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후 황대권이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무려 13년 2개월이 걸렸습니다. 30세부터 44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라는 시기에 그는 사회로부터 추방당해야 했습니다.
이 책의 글들은 저자 황대권이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입니다. 편지이자 야생초 도감 그리고 옥중 일기이기도 한 글과 그림들, 저자가 서문에 남긴 한 구절에 유독 눈길이 갑니다.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야생초 관찰일기이지만, 실은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한 젊은이가 타율과 감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던 생명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 황대권(야생초 편지의 서문 中)
야생초 편지 - 황대권 지음(도솔)
편지로 남긴 야생초 도감 그리고 옥중 일기
약을 구하기 힘든 수감생활 중에 자신의 만성 기관지염을 고쳐보려는 심산으로 야생초를 뜯어 먹었던 것, 그것이 황대권과 야생초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인생의 황금기에 찾아온 억울한 감옥살이, 기댈 곳 없었던 그에게, 가장 보잘것 없고 힘없는 야생초가 어깨를 내미는 것 이었습니다. 마치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의 마음으로, 안동교도소와 대구교도소 그리고 대전교도소를 거치는 동안 자신만의 야생초 밭을 가꾸고, 야생초를 맛보고 또 관찰하였습니다. 그리고 수감생활중에 기록물을 남길 수 없었던 그는 이러한 야생초에 대한 애증을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고스란히 담아내었습니다.
추려내고 추려낸 것이 책 한권으로 나왔을 정도이니 그가 수감생활동안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글들은 애시당초 책을 만들 것을 염두해 두고 쓴 것이 아니라,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였기 때문에 전혀 아무런 꾸밈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일상에서 바로 건져올린 싱싱한 글들은 이 책이 가지는 묘미 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십수년이 흐른 지금 읽어보아도 여전히 살아있더군요. 편지에는 정말, 고립된 곳에서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가족들을 걱정하고 또 그리워하는 여동생의 오빠가 있었습니다. 또한 편지는 세상과 단절된 교도소라는 곳 에서도 사람사는 희노애락을 담아낸, 애환의 옥중 일기이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친근하고 정겨운 말투로 써내려간 야생초에 관한 기록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수준의, 야생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한 해박한 지식은 야생초에 대한 애정과 직접 가꾸고, 관찰하고, 맛보았던 경험이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특히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야생초에 대한 몹시 세밀한 관찰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옥중 동지이자 삶의 버팀목이었던 야생초
글들은 비록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였다고는 하나, 편안하고 또 재미있고 유쾌한 것이 도무지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 쓴 편지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 내뿜는 열정 또한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저자 황대권에게는 분명 '야생초'였을 것입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했던 그에게 만일 야생초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 13년이 넘는 긴 수감생활 동안, 혹은 지금까지도 좌절 속에서 살아가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기댈곳 없는 그에게 야생초는 가장 든든한 옥중 동지이자 삶의 버팀목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랬던가요? 잡초란 아직 인류가 그 활용도를 밝혀내지 못한 풀이다라고, 이 책을 읽고 저는 그 말에 정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작성한 이 다채로운 풀들에대한 기록을 읽고 있노라면, 흔히들 잡초라고 싸잡아서 부르던 풀들에도 각각 저마다의 개성과 기품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저마다의 맛과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잡초라고 놀려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의 꽃을 피워내는가 하면, 아무리 짓밝고 뽑아내어도 땅위로 고개를 드미는 야생초에게서 저자가 보았던 것은 아마도 '생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생물이든 그리고 만물에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오만한 인간들이든 생명 앞에서는 본질 적으로 같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모두는... 풀 한 포기, 개미 한 마리 그리고 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우주속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 입니다. 생명의 동질성과 존재자체의 존귀함, 이것이 바로 저자 황대권이 말하는 생태주의적 시각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과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금 가장 귀기울여야할 목소리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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