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인연'을 읽고

 

 

 

세월의 흔적이 돋보이는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책이 심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게 노르스름하게 색이 바래 있었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것이 묻거나 훼손된 책에서 느끼는 그런 낡음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세월의 흔적이 자연스러운 중년 여성에게서 느끼는 고풍스러움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은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 입니다. 선생님의 이름이 독특한 덕분에 '피천득'이란 이름은 꽤나 익숙하지만, 사실 피천득 선생님의 글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고향집의 책장에서 발견한 책이 바로 '인연'이었습니다. 거의 20년 전에 발간된 책이니, 저의 부모님은 제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 할 때 즈음 이 책을 읽으셨을 것 입니다. 그리고 강산이 두번 바뀐 후 제가 다시 그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금아(琴兒) 피천득 (1910~2007)

 

피천득

저는 당연히 피천득 선생님의 제자도 아니고 친분도 없지만은, 그야말로 한 세기를 살다가신(1910~2007) 어른에 대한 예우로 저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렵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 등 굴곡이라는 표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격동을 세월을 정통으로 받아내셨습니다. 시인이자 수필가 그리고 영문학자였던 선생님은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아이와 같이 순수하셨습니다.

 

인형이 처음에는 백화점에 같이 나란히 앉아있는 친구들을 떠나 낯선 나하고 가는 것이 좀 불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상자에 들어 있는 저를 들고 오지 않고 안고 왔기 때문에 좀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책에는 선생님의 그런 순수함이 돋보이는 일화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딸에게 사준 인형에 대한 일화가 기억에 남는데, 미국에서 사온 인형에게 이제는 한국에서 살테니 '난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딸을 시집보내고 난 후에는 딸을 그리워하며 난영이의 낯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며 보살폈다고 합니다.

 

인연 - 피천득 지음(샘터)

 

수필집 '인연'

피천득 선생님은 시인이자 수필가였는데, 시 보다는 수필을 통하여 문학의 진수를 드러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제대로 읽은 것은 이 책 '인연'이 처음이었습니다. 오래된 책이지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의 글은 제가 알고 있는 표현으로는 유려하다는 표현이 잘 맞을것 같습니다. 유려하다는 것은 유연하고 경쾌하지만, 화려하고 현란하다는 것과는 다른 담백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글도 꼭 그랬습니다. 그 역시도 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

 

제일 첫 장에 나오는 수필에 대하여 쓴 그의 글 처럼, 이 수필집 역시 사소한 일상 속에서 멋을 발견해 건져올린 듯 합니다.


 

팔에 안긴 아기가 자나 하고 들여다보는 엄마와 같이 종이에 싸인 장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피천득 선생님의 글은 요즘 나오는 어떤 책들과 비교하더라도 세련됨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사책 속에서나 만나 볼 수 있었던 도산(島山), 그 유명한 도산(島山) 안창호 그리고 변절한 춘원(春園) 이광수와의 일화를 수필집에서 만나게 되니 시대와 역사가 느껴졌습니다. 그 시대를 겪어보지 않은 저는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알지 못하겠지만 잠시 숙연해집니다.

 

뉴튼 이래의 최대의 과학자라는 칭송이 아니라도 그는 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지 못하고도 칸트의 생애를 흠모할 수 있듯이 상대성 이론을 모르고도 아인슈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의 아인슈타인은 우리 모두의 아인슈타인이기도 하다.

 

아인슈타인에 관하여 쓴 일화가 저는 특히 인상깊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흠모한 피천득 선생님 처럼, 이 '인연' 이라는 수필집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96년에 발간된 책이니, 그는 이미 문학적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겟으나, 이 책에서는 문학인으로 유명한 피천득이 아니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 소년을, 딸아이를 끔찍이 아끼는 한 아버지를 그리고 봄과 종달새를 좋아하는 한 노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피천득이라는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는 책이라서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유난히 독특한 이름에 대한 일화도 만날 수 있어서 웃음짓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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